히라도의 역사

바다에 면하여 해외로 문을 연 히라도는 일본의 역사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해 왔을까? 해외와의 교류, 성의 역사와 번의 역사, 개성있는 영주들의 등장 그리고 독자적인 문화가 꽃을 피운다.
고대부터 ‘심적 유대감’을 소중하게 여기며 바다 너머와의 교류를 통해, 전세계 사람들을 매료시켜 온 히라도. 국제 교류의 거점으로 번영을 누린 히라도는
이국 정서가 물씬 풍기는 역사를 전하는 건물과 수많은 사적으로 둘러싸여, 현재도 전세계의 사람들과 연결되어 다양한 활동 및 교류를 깊게 다지고 있다.
성하마을 특유의 아름다운 거리경관과 잘 어우러진 풍경은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히라도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543 다네가시마섬에 포르투갈선 표착. 화승총이 전래된다.

1550

포르투갈선이 처음으로 히라도에 입항.

1550년, 포르투갈선의 히라도 입항으로 인해 서구 문화의 물결이 전해지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무역에 의한 발전에 기대를 품은 마쓰라 다카노부는 천주교의 포교도 승인하여 포르투갈선은 히라도에 항상 내항하였습니다. 무역의 중심지이자 일본에서 으뜸가는 양항으로 히라도는 알려지게 됩니다.

1551 히라도에 교회가 세워진다.
1587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평정에 참가. 영지 안도의 주인장이 발행된다. 천주교 신도 금지령이 발령된다.

1599

히라도성 축성(히노타케성).

히라도번에서는 가신단의 재편 및 영토 지배의 강화를 추진함과 더불어, 거성의 확충 및 성하마을의 정비가 필요했습니다. 이에 1599년, 마쓰라 시게노부(호인)가 가메오카 지역(히노타케)에 새로운 성의 축성을 시작. 『고요로쿠』의 기록에 의하면, 히라도성은 이 해에 착공하여 12년 이상의 세월을 거쳐 완공되었다고 전해집니다.

1600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난다. 네덜란드선 리프더호가 분고 지방에 표착한다. 영국 동인도 회사가 설립된다.
1603 에도 막부가 열린다.
1609 네덜란드선이 히라도에 입항. 히라도 네덜란드 상관이 설치된다.
1613 영국 상선이 히라도에 입항. 히라도 영국 상관이 설치된다.

1613

히라도성의 소실.

1613년 8월, 막 완공된 거성(히노타케성:현재의 히라도성이 있는 장소)을 마쓰라 시게노부(호인)가 스스로 불을 질러 태워버리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도요토미 가문과 관계가 깊었던 마쓰라 가문은 막부로부터 그 동향을 의심 받은 것이 원인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성이 소실된 후 히라도성이 재건될 때까지의 약 100년간, 마쓰라 가문은 오타치(현재 마쓰라 사료박물관이 있는 장소)를 본거지로 삼았습니다.

1616 네덜란드·영국 무역이 히라도와 나가사키에 한정된다.
1619 히라도의 네덜란드·영국 동맹이 성립.
1623 히라도 영국 상관이 폐쇄된다.
1624 훗날 명나라 부흥 운동에 활약한다. 정성공 히라토에서 탄생한다.
1633 봉서선 이외의 해외 도항이 금지된다(제1차 쇄국령).
1637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난다. 마쓰라 시게노부(덴쇼) 4대 영주로 취임한다.
1639 포르투갈인의 내항이 금지된다.
1640 히라도 네덜란드 상관(각종 시설)의 파괴 명령이 내려진다.
1641 히라도 네덜란드 상관이 폐쇄. 나가사키 데지마로 이전한다.

1670

마쓰라 시게노부(덴쇼), 무가 다도 ‘진신류’를 창시.

마쓰라 시게노부(덴쇼)는 내정에 주력하는 한편, 시가나 다도 등 문화 방면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훗날 막부의 다도 지도관이었던 가타기리 세키슈를 기본으로, 타류의 장점을 받아들여 다도 진신류를 창시. 그 유파의 의의는 ‘문무겸비’를 중시하고 마음을 갈고 닦는 수행의 장이며, 무가 다도로써 행해졌습니다.

1691 마쓰라 다카시, 막부의 사찰담당관에 취임한다.

1704

히라도성의 재건축 시작.

히라도번의 행정은 마쓰라 시게노부(덴쇼) 시절에는 오타치의 협소한 지리적 특징 때문에 정무에 무리가 있었습니다. 장남 다카시가 영주가 되고, 쇼군 쓰나요시의 도자마 다이묘 등용책에 의해 사찰담당관에 취임. 이를 기회 삼아 히라도성의 재건축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재건축 공사에서는 은화 1,080관, 누적 인부 수 543,000명을 들여 1718년에 완공시켰습니다.

1775 마쓰라 기요시(세이잔) 9대 영주에 취임한다.
1779 마쓰라 기요시(세이잔) 번청학교 ‘이신칸’을 창설. 히라도성에 ‘라쿠사이도 문고’를 설립한다.
1813 이노 다다타카 8차 측량을 위해 히라도를 방문한다.

1821

마쓰라 기요시(세이잔), 수필집 ‘갓시야와’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에도시대 후기의 문인 다이묘로 유명한 영주 마쓰라 기요시(세이잔)는 칩거 후에 에도에 머물며, 대학자 하야시 줏사이와 깊은 교류를 넓혀 왔습니다. 그의 권유를 받아 1821년 음력 동짓달 갑자날 밤부터 원고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연유로 동 서적의 표제가 ‘갓시야와(甲子夜話)’가 되었다고 합니다. 내용은 정치나 외교 문제, 민중의 생활, 풍속 등 장르는 각양각색. 82세에 사망할 때까지 278권, 약 7000항목을 정력적으로 집필 작업을 하였고, 그 부본·사본은 현재 나가사키현 지정 문화재로 되어 있습니다.

1835 마쓰라 기요시(세이잔)의 딸 아이코 메이지 천황의 모친 요시코를 낳는다.
1850 요시다 쇼인이 히라도에 유학.
1852 메이지 천황 탄생(생모는 고메이 천황을 시중 든 마쓰라 기요시(세이잔)의 손녀 나카야마 요시코).
1853 우라가 앞바다에 페리 제독이 이끄는 흑선(서양 증기선)이 내항.

1859

나가사키, 하코다테, 가나가와가 외국을 향해 개항.

흑선이 내항한 이듬해인 1854년에 막부는 ‘미일 화친 조약(가나가와 조약)’을 맺었으며, 이어서 1858년에 ‘미일 수교 통상 조약’을 맺고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 각국과도 동일한 조약을 맺었습니다. 조약에 따라1859년에는 나가사키, 하코다테, 가나가와를 개항하여 외국과의 자유 무역을 허가했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함께 이민족을 물리치자는 양이 운동이 격화되어, 사회 정세는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1860 외국 선박이 빈번하게 출몰. 히라도세토에 포대를 설치한다.
1867 대정봉환에 의해 260년간 이어져 온 에도시대는 막을 내린다.
1868 보신 전쟁, 도바 후시미 전투에 교토의 무사가 참전한다.